타리스만

아이유(IU) 모던타임즈 분홍신 등등 상상의 나래로 써본 앨범음악리뷰

묵직하지도, 경쾌하지도 않은 투명한 빗줄기가 흐리터분한 마음을 눅눅히 적시던 밤이었다. 얇은 신발이 젖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채 눈부신 네온사인 사이로 한없이 적막한 발걸음만 추적추적 옮기고 있었다. 머물 데 없는 시선은 그저 발밑에 튀기는 물방울에만 고정된 채.

 

영혼없는 귀가길을 서두르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베이스를 튀기는듯한 낮고 잔잔한 멜로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엇이 나를 이끌었을까.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 골목길을 돌아서니 그곳엔 작고 허름한 재즈바가 문이 열린채로 있었다. 


어색하게 기웃거리다 어렵사리 안으로 들어서니 비로소 묘연했던 음악의 정체가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아이유 - 을의 연애 (with 박주원)

매우 경쾌한 기타의 선율, 거기에 하모니를 이루는 듣기 좋은 베이스의 튕김. 그 발랄한 재즈곡의 멜로디는 단숨에 내 모든 신경을 빨아들였다. 잠깐의 연주가 이어진 후 긴 생머리를 풀어내린 동양의 한 소녀가 무대위로 등장했다.


1930년대 시카고 중심부를 연상시키는 신비스러운 이 재즈클럽과 아이유라고 자신을 소개한 동양소녀의 다소곳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아이유는 더이상 앳된 동양소녀가 아닌 베를린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집시 유랑악사로 빙의했다.


경험없은 어린 소녀가 연애에서 주도권을 뺏겨 귀여운 고민을 하는, 을의 입장에서의 연애를 표현한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어느새 나는 이 재즈클럽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풋풋한 그녀가 해본 사랑이란 이 노래가사처럼 현대적이고 아이들스러운 연애였을까 생각하며 첫 곡의 여운을 음미했다.


 


아이유 - 누구나 비밀은 있다 (Feat. 가인 of Brown Eyed Girls)

눈화장 짙게한 또다른 동양소녀, 아니 동양누님이 무대로 올라와 두번째 곡을 함께 했다. 재즈가 라틴풍으로 스윙템포가 가미되고 전자음이 합쳐진 누구나 비밀은 있다 라는 곡은 보다 어슴푸레한 느낌의 노래였다. 을의 연애를 부르며 재즈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던 아이유가 한층 더 깊은 감수성을 표출하며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눈화장 짙은 동양누님의 허스키한 보이스를 아이유가 긴장을 유지한 채 잘 감싸며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무거워지는 노래 분위기처럼 창 밖에는 빗방울이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중이었다. 집으로 곧장 가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브랜디 한 잔을 주문했다. 


찰랑거리는 얼음 소리가 시원한 언더락 잔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끼며 아이유과 가인, 흥겹게 어울리는 두 여가수의 비밀은 무엇일까 짐작해보았다.


 


아이유 - 입술사이 (50cm)

그녀의 노래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면서도 그 물결이 크게 파도치지 않아 듣는이를 놓치지 않고 손을 꼭 잡은채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야밤삼경의 숨막힐 듯한 중압감을 농염한 색채로 풀어놓는 이번 노래는 흡사 하나의 미술작품과도 같았다. 칠흑같은 밤하늘을 캔버스삼아 아이유는 한소절 한소절 수줍고 야릇한 음색으로 노래를 칠해나갔다.


입술 사이의 거리를 지키고 아직은 참으라는 Largo, Adagio 연애템포의 요구는 느릿하고 끈적한 이 곡 그자체였다. 귓가에 입김이 닿을듯이 가까운 거리에서 입술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하여, 노래를 들을수록 유혹은 짙어지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아이유 - 분홍신

이어서 이 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던, 분홍신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가뿐한 스윙비트가 울려퍼지자 흥에 취한 사람들은 무대 위로 올라가 탭댄스를 밟으며 즐겼다.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구두에서 영감을 받은 이 곡은 단순히 하나의 노래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가슴을 후벼파는 멜로디와 가사, 경쾌하면서 또한 장중함 속에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빅밴드의 연주, 잃어버린 Summer Time을 찾아가는 운명의 여정을 표현한 화려한 무대. 이 모든 것이 합쳐진 분홍신은 하나의 뮤지컬로 불러야 마땅했다.


온몸에 작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아이유의 노래를 감상하다, 후반부의 폭주하듯 절정을 내달리는 부분이 끝났을 때는 일어서서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쳐야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공연을 브랜디 한잔에 즐기고 있노라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도 슬쩍 들었다.


 


아이유 -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오늘 아이유의 공연에 붙여진 제목이 Modern Times 인 이유를 잘 알려주는 곡이 다음 차례였다. 1930년대 시대상을 대표적으로 말해주었던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모티브로 하여 리드미컬한 행진곡 사운드에 당시 유행하던 딕시랜드 재즈스타일의 음악이 가미되어 이번에는 한 편의 흑백영화를 감상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항상 우리에게 웃음을 주지만 그 이면에 상처와 고독, 슬픔을 껴안고 이겨내고 있는 광대를 위로하듯 아이유는 밝게 인사하며 채플린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힐링의 노래를 웃으며 열창했다. 노래 중간 그녀가 찡긋하며 눈인사를 보낸 관객석의 자리에는 이 산뜻한 대화같은 노래가사를 작사한 김이나 작사가가 앉아서 술잔을 들어 화답했다.



아이유 - 싫은 날

어느덧 중반을 넘어 치닫는 공연의 열기를 잠시 식혀주기 위해 아이유는 스탠딩 마이크를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 외로움 짙게 묻어나는 음색으로 싫은날을 노래했다. 그녀에게 가수의 명성을 안겨준 대표곡 좋은날을 180도 바꿔놓은 회색빛 색채의 곡이었다. 


창밖에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덧 힘을 잃고 촉촉한 갬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재즈클럽 안의 공기는 두거운 시가 연기처럼 혼탁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좋은날과 대비되는 싫은날을 듣고 있자니 문득 예전에 존슈미츠의 all of me를 none of me로 편곡했던 jasonlyleblack의 피아노 연주가 떠오른다.


 


아이유 - 오블리비아테 (Obliviate)

싫은날을 부르며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일까. 다음에 이어진 아이유의 곡은 그녀가 괴로운 사랑을 이겨내기 힘들어 나쁜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주문을 외우는 내용이었다. 오블리비아테를 외치는 간절하고 처절한 그녀의 모습은 공연 처음에 을의 연애를 노래하던 앳된 모습에서 어느새 훌쩍 성숙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펑펑 터뜨릴 듯 슬픔이 가득했지만, 속도감 넘치는 보사노바 반주와 이 곡 오블리비아테에도 마법같은 가사를 불어넣은 김이나 작사가의 솜씨가 어우러져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곡이 끝나버렸다. 아마 무대에 서있는 아이유 그녀에게도 좋하는 노래를 맘껏 부르는 것이 싫은 기억을 지우는 가장 효과적인 오블리비아테가 아닐까.




아이유 - 아이야 나랑 걷자 (feat. 최백호)


아이유 - 한낮의 꿈 (feat. 양희은)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렀나 싶었을 때쯤, 최백호와의 듀엣무대가 이어지며 재즈클럽의 밤은 다시금 불타올랐다. 을의 연애를 연주했던 기타리스트 박주원이 재등장해 감미로운 배경음을 연주하며, 인생을 관조하는 최백호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와 아이유가 더하는 청아한 소녀의 속삭임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하모니가 탄생했다.


애초에 그녀가 이 재즈클럽에서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것부터가 굉장한 것이었는데, 어떤 노래를 때론 누구와 함께 하더라도 위화감 없이 완전히 녹아드는 모습에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감탄하고 있을 시간도 주지 않고, 양희은과 호흡을 함께한 한낮의 꿈을 부를 때에는 나는 그자리에서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숨만 내쉬는 것이 겨우였다.




아이유 - 하바나 (Havana)

이쯤되니 재즈클럽에서 아이유의 공연을 듣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곳은 그녀가 노래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아이유의 클럽이 되었던 것이었다. 끈적이는 재즈 보컬로, 어둡고 무거운 집시여인으로, 현란한 탭댄스로 흥겹게 춤추는 스윙 리듬을 밟았다가 경쾌하고 가벼운 라틴 삼바까지. 그녀의 잠재력은 어디까지인걸까. 


햇살이 얼핏 달콤한 귤빛 으로 찬란히 부서지는 쿠바의 하바나에서 달콤한 연인들의 한때를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사운드와 언밸런스 되는 듯하다가 다시 화음을 이루면서 명랑하게 이어졌다. 기분좋은 들림에 점점 현실이 아닌 꿈속을 걷는 듯한 착각마저도 일었다.


 


아이유 - 우울시계 (feat. 샤이니 종현)


잃어가던 현실감은 우울시계를 들으면서 더욱 가중되었다. 노래 뒤로 째깍 째깍 들리는 시계태옆 소리. 시간이 흐르면 이불 걷어찰 어린 기억... 부분의 노랫말이 들려올 때 나도 모르게 발길질을 해서 이불을 뻥 찼다. 동시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침대에 누운 채, 귓가에 꼽힌 이어폰에서 아이유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1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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